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보르지긴 카이두(몽골어: ᠪᠣᠷᠵᠢᠭᠢᠨ
ᠺᠠᠶᠳᠣ, 한국 한자: 孛兒只斤海都 패아지근 해도, 1230년 ~ 1301년)는 우구데이 칸국을 다스렸던 칸(재위:1248년 ~ 1301년)이다.[1] 당숙뻘이 되는 쿠빌라이 칸과 몽골 제국의 패권을 놓고 50년간 경쟁하였다.
초기의 삶[편집]
카이두는 1230년에 우구데이의 5남인 카시(合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아직 어렸던 1241년에 우구데이가 죽자 대칸의 자리를 두고 우구데이의 아들인 구유크와 킵차크 한국의 바투 간에 분쟁이 발생했다. 1246년, 구유크는 바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칸위에 올랐다. 이렇게 칸위에 오른 구유크는 재위 3년 만인 1248년에 사망하였고, 그 후 바투와 연합한 툴루이계와 우구데이계간의 분쟁이 다시 발생하게 됐다. 이 분쟁에서는 바투와 툴루이계가 승리하여 1251년에 툴루이의 장남인 몽케가 대칸에 선출되었다.
툴루이계열과 갈등[편집]
1251년 툴루이계의 몽케가 대칸에 선출되자 시레문(失烈門)을 비롯한 우구데이계 왕자들은 대칸의 자리를 되찾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음모는 금세 발각되어 음모의 주동자인 시레문을 비롯한 여러 우구데이계 왕자들과 구유크의 미망인인 오굴 카이미쉬 등이 숙청당했다.
카이두 역시 이 숙청 과정에서 희생당할 뻔했으나 미리 몽케 칸에게 복종하여 목숨을 건졌다. 목숨을 건진 카이두는 자신의 영지로 가서 와신상담하며 우구데이계의 부흥과 툴루이계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차가타이 칸국 정벌[편집]
1259년, 몽케 칸이 남송 원정 중 사망하자 다음 해인 1260년에 그의 동생인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가 각각 대칸을 칭했다. 서로 대칸을 칭한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는 곧바로 전쟁에 들어갔다. 전쟁은 중국 북부의 풍부한 물자를 가진 쿠빌라이에게 시종일관 유리하게 진행됐다. 이에 아리크 부케는 자신이 임명한 차가타이 칸국의 알루구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알루구는 이 요청을 거절하고 오히려 1263년에 쿠빌라이와 동맹을 맺었다. 쿠빌라이와 동맹을 맺은 알루구는 카이두가 아리크 부케를 도왔다는 구실로 카이두를 공격했다. 알루구의 공격을 받은 카이두는 킵차크 칸국의 베르케의 지원을 받아 차가타이 칸국의 영토로 침입하여 알루구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다음 번 전투에서 반격을 당해 본국으로 철수했다.
한편 몽골 초원에서는 1264년에 아리크 부케가 최종적으로 패하고 쿠빌라이가 유일한 대칸이 됐다. 최대의 경쟁자를 제거한 쿠빌라이는 이후 알루구와 협력하여 카이두 제거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던 1266년에 알루구가 죽고 알루구에 의해 쫓겨났던 무바라크 샤가 잠시 칸위를 차지했다가 곧 바락으로 교체됐다.
차가타이의 칸이 바락으로 교체되자 카이두는 다시 원정에 나섰다. 카이두는 킵챠크 칸국의 만그 티무르의 지원을 받아 차가타이 칸국을 침입하여 시르다라강 근처와 코잔드에서 벌어진 두 번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두 번의 전투에서 패한 바락은 트란속시아나[2]로 도망친 뒤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약탈하여 군대를 다시 모았다. 바락의 격렬한 저항으로 전쟁이 장기화될 기미를 보이자 카이두는 배후의 쿠빌라이가 침입해올 것을 염려해 바락과 강화를 체결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강화[3]의 결과 카이두와 만그 티무르가 트란속시아나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됐으며 카이두는 차가타이 칸국이 소유하고 있던 투르키스탄 대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4] 하지만 카이두는 강화대로 이 땅을 만그 티무르에게 주지 않고 자신의 영토로 병합시켰다.
강화는 체결되었지만 바락은 이 강화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부하라를 재정복하려 했으며 사마르칸트를 약탈하려고도 했다. 카이두는 바락의 이러한 불만을 이용하여 바락에게 아바카가 다스리고 있는 일 한국을 공격할 것을 종용했다. 바락은 이 제의에 쉽게 응하여 일 한국을 공격할 준비에 나섰다. 이에 카이두는 자신의 아들인 차파르]가 이끄는 군대를 지원했으며 킵차크 칸국 역시 군대를 지원했다. 킵차크 칸국과 카이두의 지원을 받은 바락은 아바카 휘하의 장수인 테구데르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한 뒤 군대를 일으켜 호라산에서 일 칸국의 군대를 격파했다.
하지만 킵차크 칸국과 카이두는 바락의 성공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킵차크 칸국 군대는 바락 휘하의 장군인 자라일타이(Jalayirtai)와의 언쟁을 구실삼아 군대를 퇴각시켰다. 바락은 자라일타이를 보내 킵차크 칸국 군대에 용서를 구하고 복귀할 것을 설득했지만 허사였다. 킵차크 칸국의 군대가 떠나자 카이두가 보낸 차파르 역시 자신의 군대를 버리고 본국으로 도망가버렸다. 차파르가 도망오자 카이두는 아예 바락과의 관계를 끊고 아바카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설상가상으로 1270년, 바락의 군대는 아바카와의 전투에서 대패를 당했고 바락은 부상을 입었다. 엄청난 손해를 본 채 본국으로 돌아온 바락은 카이두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카이두는 군대를 보내는 것으로 응답했다. 결국 1271년, 바락은 카이두의 군대에 둘러싸인 채 막사에서 사망했으며 카이두는 죽은 바락 대신 네구베이(Negubei)를 차가타이 칸으로 세웠다.
하지만 차가타이 칸국은 녹록치 않았다. 알루구와 바락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우구데이 칸국과 카이두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고 네구베이가 그들에 동조하면서 반란은 확산됐다. 이에 카이두는 군대를 보내어 네구베이를 죽이고 부카 테무르(Buqa Temur)를 칸으로 세웠다. 새로 칸이 된 부카 테무르는 무능하여 알루구와 바락의 아들들이 일으킨 반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카이두는 1282년에 반란 세력과 타협하여 바락의 아들인 두아를 칸위에 올렸다. 칸위에 오른 두아는 우구데이 칸국에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카이두를 따르게 됐으며 카이두는 더 이상 차가타이 칸국을 걱정하지 않게 됐다.
원나라와의 대립[편집]
평소 우구데이 칸국을 껄끄럽게 생각하고 있던 쿠빌라이는 자신의 넷째 아들인 노무간에게 대군을 주어 우구데이 칸국과 맞서게 했다. 이 원정군에는 몽케의 아들인 시리기(Sirigi), 아리크 부케의 아들인 요부쿠르, 멜릭 테무르가 있었는데, 이들은 1276년에 진중 반란을 일으켜 노무간을 사로잡은 뒤 킵차크 한국에 넘겨 버리고 자신들은 카이두에게 의탁했다. 이후 차가타이의 둘째아들 사르반(Sarban)도 이 세력에 합류하여, 네 명의 왕자와 킵차크 한국 및 카이두가 반 쿠빌라이 연합을 형성하게 됐다.
1277년 카이두는 자신에게 의탁한 시리기와 사르반 등을 앞세워 카라코룸으로 진격했다. 사태가 심각함을 깨달은 쿠빌라이는 즉시 명장 바얀을 불러 이들을 막게 했다. 바얀은 남송과의 전투에서 보여줬던 뛰어난 용병술을 바탕으로 그들의 군대를 격파했다. 바얀에게 진 뒤 왕자들은 내분을 일으켰으며 결국 사르반이 시리기를 넘기는 대가로 바얀에게 항복하면서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1년 뒤인 1278년에는 킵차크 한국에 붙잡혀 있던 노무간마저 풀려나고 말았다.
1287년, 카이두는 만주와 동몽골을 영지로 하는 카사르의 후손 식투르, 카치운의 후손 카다안, 테무게 옷치긴의 후손인 나얀[5]과 동맹을 맺고 다시 쿠빌라이와의 전쟁에 나섰다. 1288년, 동쪽 군대의 맹주인 나얀은 쿠빌라이의 친위대와 결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쿠빌라이에 의해 처형당했다. 나얀이 패한 이후 대부분의 반란 가담 세력들은 쿠빌라이에 항복하였다. 동쪽 반란군과 함께 진군했던 카이두는 쿠빌라이의 손자인 카말라를 격파하는 등 우세한 전황을 유지했지만 나얀을 평정한 쿠빌라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회군하였다. 이 원정이 실패한 후 카이두는 산발적인 전투를 몇 번 더 벌였으나 바얀의 방어에 막혀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1294년, 원나라를 건국한 쿠빌라이가 사망하고 그의 손자 테무르 올제이투가 제위에 올라 성종이 됐다.[6] 그로부터 3년 뒤인 1297년, 아리크 부케의 아들인 요부쿠르와 몽케의 손자 울루스 부카가 우구데이 칸국을 이탈하여 원나라로 귀환하였고 이로 인해 카이두의 세력은 크게 줄어들었다.[7] 이후 카이두는 지속적으로 원을 공격하였고 1298년에는 성종의 사위인 쾨르기즈를 생포하여 처형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생애 후반[편집]
하지만 자신의 세력이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데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카이두는 1301년 아리크 부케의 차남 멜릭 테무르, 차가타이 칸국의 칸 두아와 함께 최대 규모의 원정에 나섰다. 전쟁 초기엔 카이두의 군대가 우세하여 카말라와 그의 아들 예순 테무르군대를 압도했지만 카이샨의 군대가 전장으로 지원되면서 전황은 급속도로 변했다. 차가타이 칸국의 칸인 두아는 전투 중 부상을 당해 본국으로 퇴각했고 카이두는 전투 중 입은 부상 때문에 사망하고 말았다.
카이두는 죽기 전에 자신의 차남인 오르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는 이를 무시하고 1303년에 장남인 차파르를 옹립하였다.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차파르는 두아와 대립하였고, 1306년에 두아의 군대와 원나라의 지원군에게 협공을 받았다. 양국 군대의 압박을 버티지 못한 차파르는 두아에게 항복했고 두아는 원나라와 함께 우구데이 칸국의 영토를 나눠가졌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310년, 차파르는 다른 우구데이계 왕자들인 오르스, 얀기차르, 투그메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당하고 나서 원나라로 망명했다. 차파르가 원나라로 망명하면서 우구데이 가문은 사실상 몰락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