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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쿼이 연맹Iroquois League

2021. 9. 10. 07:59 | Posted by 빠오징(寶敬)

17, 18세기에 북아메리카를 차지하기 위한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에서 전략적인 역할을 했다.

'공동주택에 사는 사람들'로 자처하던 이 연맹의 5개 종족은 모호크족·오나이다족·오논다가족·카유가족·세네카족이었다. 1722년 투스카로라족이 합류한 후, 이로쿼이 연맹은 영국인들에게 6개 부족 연합으로 알려졌다.

전통에 따라 휴런족 출신인 데카나위다가 1570~1600년 연맹의 조직을 맡았다. 그는 모호크족과 함께 살던 오논다가족의 추장 히아와타를 설득해서, 연맹을 승인하는 조치로 식인풍습을 버리고 '평화, 시민권력, 공정함, 위대한 법'을 받아들이게 했다고 전해진다. 주로 침략에 공동대항하려는 목적으로 연맹을 맺은 부족들은 씨족과 마을 추장들로 이루어진 공동회의를 통해 뭉쳤는데, 부족마다 투표권이 하나씩 있었고 만장일치제를 원칙으로 했다.

50명의 추장(sachem)으로 이루어진 공동재판소에서 부족 사이에서 일어나는 전쟁 이외의 모든 문제를 다루었다.

이로쿼이 연맹은 동북부 삼림지대의 다른 인디언 연맹과 달랐다. 우선 조직이 잘 되어 있었고, 입장이 더 명확했으며,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또한 지도자를 뽑고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의 의식은 세심하고 정성스러웠다. 식민정부를 설득해서 공동협상을 할 때도 의식은 행했으며, 뛰어난 개인보다 의식을 통한 승인에 바탕을 두는 정치적인 지혜의 전통을 소중히 했다.

행정적인 통제가 없었기 때문에 부족들이 항상 일치된 행동은 하지 못했으나, 부족 내부가 안정되어 있어 이룰 수 있었던 전쟁에서의 눈부신 승리를 통해 그러한 부족감이 메꾸어졌다.

연맹이 형성되던 1600년 무렵 5개 종족은 뉴욕 주 중부와 북부에 집중해 살았는데, 네덜란드인과의 교역을 통해 총을 공급받던 이웃 휴런족·마히칸족에 정복되지 않고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1628년 모호크족이 외딴 삼림지역에서 허드슨 계곡과 뉴잉글랜드로 진출하여 마히칸족을 공격하고 다른 부족들을 위협해 물건과 화폐로 사용하던 조가비 염주를 바치게 했다.

모호크족은 영국인·네덜란드인 등과의 교역을 통해 비버 가죽을 주는 대신 화기(火器)를 사들였는데, 비버의 수가 감소하자 더 많은 비버를 확보하기 위해 연맹에 속한 부족들을 끌어들여 멀리 떨어져 살던 부족들과 전쟁을 일으키게 했다. 1648~56년 이로쿼이 연맹은 서쪽의 휴런족·티오논타티족·뉴트럴족·이리족과 싸워 승리했다. 1675년 안다스트족이 이로쿼이 연맹에 정복되었으며, 그후 안다스트족과 동맹을 맺었던 동부 수족에 속한 여러 부족들이 공격을 받았다.

1750년대가 되자 피에몬테에 사는 부족들 대부분이 이미 연맹에 정복·흡수·전멸되었다. 이로쿼이족은 17세기 후반 프랑스인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프랑스인들은 이로쿼이족의 적인 알공킨족과 휴런족의 동맹군이었기 때문에, 1648~50년 이로쿼이족은 휴런 연맹을 공격한 뒤 이후 15년 동안 뉴프랑스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후 1666~87년에 연이은 프랑스 원정군의 공격으로 일시적으로 주춤했으나, 1687년 드농빌 후작의 공격을 받은 후 이로쿼이족은 다시 프랑스 영토 한가운데로 쳐들어가 1689년 몬트리올 부근 러신에서 프랑스군을 섬멸했다. 이 전쟁은 1693~96년 뉴프랑스 총독 프롱트나크 백작이 이로쿼이족과의 계속적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마침내 끝났다.

미국 독립전쟁 전까지 이로쿼이 연맹은 올버니에서 오대호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수면 높이의 이 통행로에 프랑스인들이 정착하지 못하도록 막거나 네덜란드인·영국인 등의 통행을 봉쇄했다.

18세기에도 이로쿼이 연맹에는 이들의 적과 동맹을 맺은 프랑스인들이 가장 큰 적이었다. 이로쿼이 연맹은 올버니에 사는 영국인들로부터 유럽 상품(몬트리올보다 올버니에서 값이 더 쌌음)을 공급받았기 때문에 올버니는 절대로 공격하지 않았다. 프랑스인과 영국인 사이에서 그들이 독립을 유지한 것은 겨우 1만 2,000명의 주민 중 2,200명밖에 전투에 동원할 수 없었던 원주민으로서는 대단한 성과였다.

미국 독립전쟁 동안 이로쿼이 연맹 사이에는 불화가 생겼다. 오나이다족과 투스카로라족은 미국을 지지한 반면, 모호크족의 조지프 브란트 추장이 주도하던 나머지 부족들은 나이애가라 지역의 영국인들을 위해 싸우면서, 미국인들이 사는 여러 외딴 마을에서 많은 주민들을 학살했다. 1779년 이로쿼이 연맹은 지금의 뉴욕 주 앨마이라 부근에서 미국의 존 설리번 중장이 이끌고 온 4,000명의 원정군에게 패함으로써 사기가 크게 꺾였을 뿐만 아니라, 밭·과수원·곡창지대까지 모두 파괴당했다. 1784년의 스탠윅스 요새 2차 조약에서 패배를 인정한 후 이로쿼이 연맹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10년 후 뉴욕 주 카넌데이구아에서 맺은 조약을 통해 이로쿼이 연맹과 미국정부는 각자 이미 양도했거나 보유하고 있는 영토에서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6개 부족 가운데 오논다가족·세네카족·투스카로라족은 뉴욕에 남아 결국 인디언 보호구역에 정착했으며, 모호크족과 카유가족은 캐나다로 갔다. 1세대 후 오나이다족은 위스콘신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