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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6.06.02 고구마와 김치
  3. 2016.06.02 양단간의 결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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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6.06.02 '채소→단백질 반찬→ 밥' 순으로 먹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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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6.05.21 철길을 통해 출근하는 한 젊은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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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6.04.28 꽃에 물을 주는 사람
  10. 2016.04.28 에누리와 차별

배때벗다

2016. 6. 24. 20:27 | Posted by 빠오징(寶敬)

 : 천한 사람이 말씨나 하는 짓이 거만하고 반지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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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와 김치

2016. 6. 2. 18:07 | Posted by 빠오징(寶敬)

고구마는 칼륨 성분이 많아서 염분을 몸 밖으로 배출 그래서 김치랑 먹음 나트륨이 보충이 된다고 함.

양단간의 결정이야.

2016. 6. 2. 18:03 | Posted by 빠오징(寶敬)

It's all or no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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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2016. 6. 2. 17:58 | Posted by 빠오징(寶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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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단백질 반찬→ 밥' 순으로 먹으라

2016. 6. 2. 17:55 | Posted by 빠오징(寶敬)

식사 순서만 바꿔도 고혈압ㆍ고혈당ㆍ고지혈증 등 ‘3高 질환’ 줄어

채소를 먼저 들고 단백질 반찬, 밥(탄수화물) 순으로 식사 순서를 지키면 고혈압과 고혈당, 고지혈증 등 이른바 '3고 질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서울성모병원 제공
채소를 먼저 들고 단백질 반찬, 밥(탄수화물) 순으로 식사 순서를 지키면 고혈압과 고혈당, 고지혈증 등 이른바 '3고 질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서울성모병원 제공

어릴 적부터 밥(빵), 반찬, 국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먹으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래서 어른이 된 뒤에도 무의식적으로 그 방법을 답습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일부 한정식과 서양식 요리는 대체로 샐러드 같은 전채와 수프 등 가벼운 국물이 먼저 나온다. 그 뒤 생선이나 고기를 이용한 메인 요리, 밥ㆍ빵ㆍ파스타 등과 같은 탄수화물 요리가 따라 나온다. 이처럼 채소를 먼저 들고 단백질 음식과 탄수화물 요리 순으로 먹기만 하면 ‘소리 없는 살인자’라고 불리는 고혈압ㆍ고혈압ㆍ고지혈증(이상지질혈증) 등 이른바 ‘3고(高) 질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가지야마 시즈오 박사는 ‘식사 순서 혁명’(중앙북스 발행)에서 “식사순서만 바꾸면 독한 약을 먹거나 음식을 가려먹지 않아도 건강해진다”고 했다. 실제로 가지야마 박사는 “8년 동안 1,000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식사 순서를 채소를 먼저 먹고, 그 다음으로 단백질 반찬, 마지막으로 밥을 조금만 먹는 순으로 바꿔보니 혈압, 혈당, 콜레스테롤이 크게 떨어졌다”고 했다.

“혈압을 더 낮춰야겠네요. 처방약을 드시고 하루 염분 섭취량은 6g 이하로 줄이세요.” “중성지방과 LDL 콜레스테롤이 기준치를 넘었네요. 동물성 지방은 적게 먹고 채소와 생선을 더 많이 드세요.”

누구나 한 번쯤 의사로부터 이런 처방을 받아보았을 것이다. 현재 고혈압 환자는 721만 명, 당뇨병 254만 명, 고지혈증 환자 139만 명에 이른다. ‘소리 없는 살인자’라는 별명처럼 고혈압ㆍ고혈당ㆍ고지혈증 등은 자각증상이 거의 없어 자신도 모르게 증상이 심각해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 3고 질환은 식습관과 관련이 많다. 고혈압은 염분 있는 짠 음식은 못 먹고, 고혈당 때문에 탄수화물을 못 먹고, 고지혈증 때문에 지방이 많은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 전문가들이 권고하는 바람직한 식단은 탄수화물 50%, 단백질 30%, 지방 20%다. 지방은 12% 이상을 등푸른 생선과 같은 불포화지방을 섭취하는 게 좋다.

이를 바탕으로 한 기존의 식이요법은 대부분 실패했다. 그래서 가지야마 박사는 발상을 완전히 뒤집어 ‘무엇을 먹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먹을까’에 주목했다. 그는 “채소, 단백질, 밥의 순서로 30분 넘게 천천히 식사를 해보니 고혈압ㆍ고혈당ㆍ고지혈증 등 3고 질환을 치료한 환자가 많았다”고 했다.

안철우 강남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도 “점심 메뉴로 밥과 국이 있을 경우 국 안의 채소를 먼저 먹고 그 다음 밥을 먹어도 혈당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이 같은 식사법은 혈당수치의 급상승을 막는다는 점에서 이상적이라는 지적이다.

지금까지 고혈압ㆍ고혈당ㆍ고지혈증은 각각 다른 원인에 의해 생긴다고 알려져 왔다. 가지야마 박사는 “이들 질병은 ‘인슐린’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섭취한 탄수화물은 몸 안에서 포도당으로 분해되는데 인슐린은 이 포도당을 혈액에서 세포로 운반하는 역할을 한다. 당뇨병은 인슐린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혈액 속 당분을 제대로 쓰지 못해 생기는 질환이다.

인슐린은 혈압과 혈액 속 중성지방에도 큰 영향을 준다. 혈액 속에 인슐린이 너무 많으면 혈관건강 유지에 꼭 필요한 일산화질소(NO) 발생이 줄어든다. 일산화질소는 혈관을 부드럽게 하고 늘리며 혈관 벽에 달라붙은 플라크 발생을 억제한다. 이런 일산화질소가 줄어들면 혈압이 올라간다. 혈중 인슐린 수치가 계속 올라가면 간과 소ㆍ대장에서 지방이 과잉 생산되는 동시에 체내 지방의 합성, 분해작용이 약해진다. 이것이 고지혈증을 일으키는 원인의 하나다.

가지야마 박사는 이런 점에서 고혈압ㆍ고혈당ㆍ고지혈증이라는 3고 질환을 치료하려면 인슐린을 조절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여기서 도출된 것이 바로 식사순서요법이다. 평소 먹던 식단을 채소, 단백질, 밥 순으로 바꾼 것이다. 50대 여성이 3개월간 식사순서요법을 실천한 결과, 최고 혈압 179㎜Hg, 식사 2시간 후 혈당 254㎎/㎗, LDL 콜레스테롤 178㎎/㎗, 중성지방 165㎎/㎗에서 3개월 후 혈당은 140㎎/㎗, DLD 콜레스테롤은 110㎎/㎗, 중성지방은 126㎎/㎗, 혈압은 정상범위로 떨어졌다고 그는 덧붙였다.

환자 15명을 대상으로 밥 150g(약 한 공기)과 채소 샐러드 위주로 식사하되 먹는 순서를 한 번씩 바꾸는 실험을 진행했다. 그 결과, ‘채소→밥’의 순서로 먹었을 경우 ‘밥→채소’의 순서로 먹었을 때보다 혈당치 상승이 완만했다. 또한 채소를 먼저 먹으면 인슐린 분비가 줄어들었다.

이처럼 식사순서요법을 지켜도 혈당치가 내려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밥을 급하게 먹기 때문이다. 가지야마 박사는 “채소 메뉴를 먹기 시작한 시각에서 적어도 10분이 지난 후에 밥을 먹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며 “5분 이상 꼭꼭 씹어 먹기를 권한다”고 했다. 하지만 너무 많이 씹으면 음식에 함유돼 있는 영양소가 파괴되니 30회 씹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권대익 의학전문기자

<식사순서요법 4가지 원칙>

-무조건 채소부터 먼저 먹는다.

-채소 다음은 단백질 반찬을 먹는다.

-밥은 마지막으로 먹는다.

-5분 이상 꼭꼭 씹으며 천천히 먹는다.

<고혈압ㆍ고혈당ㆍ고지혈증 판정기준>

고혈압 최고 혈압 140㎜Hg, 최저 혈압 90㎜Hg
고혈당(당뇨병) 공복 시 혈당치 126㎎/㎗ 이상(한국인 110㎎/㎗ 이상), 75g 당부하 시험에서 2시간 후 혈당치 200㎎/㎗ 이상, 평소 혈당치 200㎎/㎗ 이상. 이밖에 당화혈색소 6.5% 이상.
고지혈증(이상지질혈증) LDL 콜레스테롤 140㎎/㎗ 이상, HDL 콜레스테롤 40㎎/㎗ 미만, 중성지방 150㎎/㎗ 이상

정인승

2016. 5. 21. 21:39 | Posted by 빠오징(寶敬)

다른 표기 언어 鄭寅承

요약 테이블
출생일시 1897. 5. 19, 전북 장수
사망일시 1986
국적 한국

요약 조선어학회 상임이사로 〈큰사전〉 편찬에 전념했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수정 및 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해방 이후 국어 강습과 교재 편찬에 힘썼다. 국어심의회 위원, 국정교과서 편찬 심의위원, 한글전용특별심의회 위원으로 일하는 등 주로 국어교육과 관계된 방면에서 활동하는 한편 전북대학교 교수 및 총장, 중앙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정인승의 문법체계는 최현배의 문법체계에 준거하여 품사와 문장성분을 상호 연관시키는 것이었으나 지정사를 조사에 넣고 수사·대명사를 따로 설정하지 않은 7품사(이름씨·움직씨·그림씨·매김씨·어찌씨·느낌씨·토씨) 체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는 국어교육을 중시하여 여러 가지의 문법서를 저술하고 1963년 7월 15일 학교문법의 품사체계와 용어를 통일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는 등 학교문법의 통일과 확립에 공헌했다.

본관은 동래. 호는 건재. 아버지 상조와 어머니 송성녀의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문을 배우는 한편 신학문을 혼자 익히기도 했으며 1918년 서울 연정학원과 중동중학을 거쳐 1921~25년 연희전문학교에서 수학했다. 이어 1935년 3월까지 전북 고창고등보통학교에서 조선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1935년 4월 이후 조선어학회 상임이사로 〈큰사전〉 편찬에 전념했으며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수정 및 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8·15해방과 더불어 출감한 후 학회활동을 계속했다. 해방 이후 국어 강습과 교재 편찬에 힘썼다.

문교부 학술제정 위원을 비롯하여 문교부의 문법용어제정위원회 위원, 국어심의회 위원, 국정교과서 편찬 심의위원, 한글전용특별심의회 위원으로 일하는 등 주로 국어교육과 관계된 방면에서 활동하는 한편 전북대학교 교수 및 총장, 중앙대학교 교수를 역임하면서 직접 교편을 잡기도 했다. 공로상과 학술원상 및 건국공로훈장, 중앙대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정인승의 문법체계는 최현배의 문법체계에 준거하여 품사와 문장성분을 상호 연관시키는 것이었으나 지정사를 조사에 넣고 수사·대명사를 따로 설정하지 않은 7품사(이름씨·움직씨·그림씨·매김씨·어찌씨·느낌씨·토씨) 체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다.

정인승의 문법교과서의 체재는 '모두풀이·씨의풀이·월의풀이'의 3부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품사론에 해당하는 '씨의풀이'가 가장 강조되고 있다. 이는 당대 문법연구의 경향과 일맥 상통하는 점이다. 이밖에 본격적인 조어법은 아니나 어근과 접사를 중심으로 단어 형성법을 다룬 것이 주목할 만하다. 특히 그는 국어교육을 중시하여 여러 가지의 문법서를 저술하고 1963년 7월 15일 학교문법의 품사체계와 용어를 통일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는 등 학교문법의 통일과 확립에 공헌했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한글독본〉(1946)·〈한글문답〉(1950) 등의 한글관계 저서와 〈표준중등말본〉(1949, 뒤에 〈표준 우리말본〉으로 개칭되어 출간되기도 함)·〈표준중등말본〉(1956, 1949년 출판된 책과 제목은 같으나 내용은 다름)·〈표준고등말본〉(1956) 등의 교과서와 교수지침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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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을 통해 출근하는 한 젊은이가...

2016. 5. 21. 21:35 | Posted by 빠오징(寶敬)



매일 기차를 타고 출근하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기차 노선 중 오르막길이 있었는데 그곳을 지날 때면 기차도 느리게 달려
철로 옆에 있는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집 중, 늘 문이 열려 있는 한 집이 있었습니다.
방안에는 아파 보이는 한 노인분이 항상 누워계셨습니다.
매일 출근할 때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젊은이는
왠지 가슴이 아팠고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그 동네를 찾아가 그 노인분이 집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약간의 치료비와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는 편지를 써놓고 왔습니다.
물론 자신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고,
'날마다 언덕 철길을 통해 출근하는 젊은이가'라고만 써놓았습니다.

그 후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출근길 기차를 타고 가다 그곳으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여전히 문은 열려 있었지만, 노인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더 자세히 살펴보니 유리창에 큰 글씨로
무엇인가 적어 놓은 게 보였습니다.

'얼굴을 알 수 없는 젊은 그대에게 축복을'
이라고 또박또박 적혀있었습니다.



좋은 일, 나누는 일을 한다고 하면 거창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남을 위한 일은 거창한 것이 아니고, 가장 가까운 곳으로부터
작은 실천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은 일이고 나누는 일입니다.

천천히 둘러보세요. 보이지 않나요?
당신의 손길이 있어야 하는 작은 나눔이 필요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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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기 (1831년)

2016. 4. 28. 18:06 | Posted by 빠오징(寶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유홍기(劉鴻基, 1831년 ~ 1884년?)는 조선 말기개화사상가이자 학자이자 정치인이였다. 오경석과 동갑으로 한의사이다. 초기 개화사상가의 한 사람이며, 오경석(吳慶錫), 박규수(朴珪壽) 등과 함께 개화파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백의정승(白衣政丞), 산림정승이라는 별호로도 불렸다. 호는 대치(大致)로 따라서 유대치(劉大致)로도 불린다. 본관은 한양(漢陽)으로, 자는 성규(聖逵), 호는 대치(大致) 또는 대치(大癡), 여여(如如) 등이다.

유홍기는 중인 출신으로 개항 이전에 이미 개화에 대한 확고한 사상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오경석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여러 서양의 서적을 탐독하고 개화 사상에 눈을 떴다. 김옥균, 박영효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들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 당시 정계의 막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해 문호 개방과 정치 혁신을 주장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행방불명되었다. 추사 김정희 문인이다.

 

생애[편집]

초기 활동[편집]

유홍기는 1831년(순조 31년) 한성(漢城)의 무관의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무과(武科)의 유익소(劉益召)이고, 할아버지는 경희궁 오위장을 지낸 가선대부(嘉善大夫) 유흥오(劉興五)이다. 또한 그의 형 유한기(劉翰基)는 대호군(大護軍)이었다. 그의 집안에서는 역관들이 다수 배출되었고, 의업에도 종사하였다. 그의 출신은 중인이었다고 한다. 본명은 홍기(鴻基)이고 호가 대치(大致)인데 흔히 유대치로 많이 알려졌다. 그의 가문에서는 역관 46명, 의관10몀, 음양과(16명), 율과20명을 배출했다. 모두 합하면 잡과 합격자를 92명을 배출한 집안이다. 그의 집안을 역관의 집안으로 불리는데 손색이 없을것이다. 그리고 진사 1명, 무과 2명이 합격하였다. 그의 직업은 한의사이었다.

윤치호, 서재필, 김옥균, 박영효 등의 편지와 서신을 보면 대치장(大致丈, 대치 어르신)이라는 칭호로 많이 쓰인탓에 그것이 그의 이름보다 널리 알려졌던 것이다. 한의사였던 그는 친구인 역관 오경석이 청나라와 조선을 오가며 가져다 준 신 문물을 일찍이 접하였다. 그는 역관 집안에서 태어 났으므로 신분상 중인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무관이었으므로, 그는 한의업에 종사한 양반 출신 유의였다.

그의 유년기나 소년기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갑신정변으로 그의 문인들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그에 대한 자료들도 대부분 인멸, 실전되었다.

학문 활동[편집]

청년 시절[편집]

추사 김정희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그로부터 금석문 해독하는 것도 배웠다. 이후 친구인 역관 오경석청나라에서 가져온 서학 서적을 탐독, 개화에 눈을 떴으며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 청년들이 그의 무하에 출입하며 오경석, 박규수 등과 문인들을 길러냈다. 그뒤 유홍기는 개화당 인사들의 막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교 사상이 인간의 자유로운 사상을 억압한다고 본 그는 불교를 깊이 신앙하였으며 사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 고금의 역사 지식도 해박하였다. 신체가 장대하고 변설이 유창하였다고 한다.

이웃에 살던 친구이자 역관 개화사상가 오경석이 중국에서 구해온 《해국도지 海國圖志》, 《영환지략 瀛環志略》, 《박물신편 博物新編》 등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소개한 서적을 보고 탐독, 무력을 동원하여 동양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서양세력의 실체와 아편전쟁 이후 밀려오는 서양세력에 의해 반식민지가 되어가던 중국의 실상을 알게 되어 점차 개화사상 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는 1882년 11월 11일승정원일기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은 양반인 유학(幼學] 유대치를 부사용(副司勇)이라는 종9품의 관직을 내린다

개화 인사 양성 노력[편집]

유대치는 병인양요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겪은 뒤에 서세동점의 위기가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에도 급박해졌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머지않아 외세가 조선으로도 침입해올 것이며 그에 대비하여 우리가 먼저 개항과 개화를 시도하여 저들과 손잡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장을 하였다. 그의 주장에 위정척사파나 조정의 수구파는 모두 터무늬없는 생각으로 치부하였다.

한편 그는 오경석과 상의해 한성부 북촌의 영민한 양반자제들을 뽑아 그들의 개화사상과 오경석이 중국 청나라 여행길로부터 구입해 온 신문물을 소개한 서적들을 젊은이들에게 소개하고, 이를 가르치고 새사상에 동조하는 인사들을 규합해서 나라에 일대 혁신을 일으키는 정치를 실행하게 하자고 합의하였다. 그의 제의에 오경석은 적극 동조하였다. 한편 1869년(고종 6년) 지방관으로 나가있던 박규수(朴珪壽)가 평안도관찰사에서 한성부 판윤으로 임명되어 오자, 유대치와 오경석은 이 방안을 박규수에게 제안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개화파 양성, 교육 활동[편집]

유홍기의 교제 범위는 넓고 대단히 신축성이 있었고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개화승 이동인을 비롯한 탁정식, 환속한 차홍식과 김정모 같은 불교계 인사와도 접촉이 많았다. 유홍기는 개화당 인사들 뿐 아니라 각계각층 사람들을 만나 담론할 때마다 세계의 신지식 즉 역사, 지리, 풍속, 외교, 국방, 과학기술, 국제정세 등을 전달했다. 개화사상을 주입시키거나 그 필연성을 강조한 것이다. 당시 중인들이 많이 살던 관철동 그의 집 사랑방은 개화혁신 사상의 온상이며 담론의 장소였다.

1877년 초기개화파 형성에 참여했던 박규수가 병으로 죽자, 오경석을 통하여 박규수의 영향 아래 있던 김옥균, 박영효, 박영교, 홍영식(洪英植), 서재필, 서광범(徐光範), 백춘배(白春培), 유길준, 오세창, 윤치호, 정병하(鄭秉夏), 이종원(李淙遠), 이정환(李鼎煥), 박제경(朴齊絅), 이동인(李東仁), 탁정식(卓挺植) 등의 청년들을 소개받아 함께 지도하게 되었다. 1879년 오경석이 병으로 죽게 된 뒤로는 혼자서 이들을 지도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연고로 세간에서는 그를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유대치는 개화파 인사들과의 연락행동 책임자로 이동인일본 본원사(本願寺) 승려의 도움으로 1879년 8월 일본에 밀항케 했다. 이동인이 일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올 때 서울에 있던 유대치는 부산에 가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이 때 이동인대원군계열의 동래부사에 체포되어 옥에 갇혀 있을 때 유대치가 백방으로 주선하여 석방했다.

생애 후반[편집]

관료 생활[편집]

그는 일찍이 백의정승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지며 그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1882년(고종 19년) 감생청(減省廳)의 참봉으로 출사하여 감생청 직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개항 후 개화파들이 정계에 진출하고 정부에서도 개화정책을 실시하면서 행정기구를 미국 혹은 일본식으로 본딴 새 기관으로 행정조직을 개편 정리하기 위한 임시기관으로 감생청을 설치할 때 직원으로 임명된 것이다.

과거에 합격하지 않고 특채로 관직에 올랐으며 그는 말단 실무관료의 직책에 있었지만 감생청 제조 어윤중의 자문역을 겸하였다. 어윤중은 유대치로부터 지도를 받고 일본과 중국을 시찰하였으며 귀국한 뒤에는 유대치를 방문하여 그의 견문사항을 이야기하며 논의했다.

유홍기는 감생청 직원들을 지도 국가 제도 전반에 걸친 정리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수구파와 위정척사파의 반대로 정리 안이 시행되지 못했다. 유대치는 감생청 직원이 된지 1개월 만에 감생청부사용에 임명되었다가 곧이어 사용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감생청이 수구파와 위정척사파들의 반대와 규탄 상소로 결국 6개월 만에 폐지되고 말았고, 그는 타 직책을 주선해 주겠다는 어윤중, 김옥균의 제의를 사양하고 관직에서 떠나게 되었다. 이후 당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있던 윤치호(尹致昊) 등 개화파 인사들이 고종에게 여러 번에 걸쳐 그를 등용할 것을 상주했으나 등용되지는 못했다. 개화파 인사들은 고종에게 유대치의 인품과 식견을 이야기하면서 그를 등용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끝내 등용되지 못했다.

갑신 정변의 실패와 최후[편집]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음력10월17일)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유홍기는 오경석의 아들인 오세창(吳世昌)의 가족과 함께 경기도 파주로 피신하였다가 12월 8일(음력10월21일)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혹시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로 중도 개화파가 급진 개화파에게 대대적인 보복을 행할 때 암살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사후[편집]

1908년(융희 2년) 개화파 인사들이 주동이 되어 경성에서 애국사사추도회(愛國死士追悼會)를 열었을 때, 유대치 역시 순국한 애국자의 한 사람으로 추도되었다. 그는 1910년(순조3년) 8월에 정삼품(正三品) "통정대부(通政大夫) 규장각(奎章閣) 부제학(副提學)"이란 벼슬이 특증(特贈)되었다.

한때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으로 갑신정변과 관련된 인물들의 복권이 이루어진 뒤에도 행적이 드러나지 않았다.

논란과 의혹[편집]

사망 관련 의혹[편집]

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1884년(고종 21년) 12월 8일(음력10월2일)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의 최후를 두고는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있다.

이능화가 지은 <조선불교통사>에는 ‘유대치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김의환이 지은 <조선개화당의 막후 지도자 유대치의 활약과 그의 최후>라는 논문에서는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경기도 용문산에 토굴을 짓고 살면서 1890년 경 임종할 때까지 좌선(坐禪)으로 일관하며 살았다’고 쓰여 있다

본관 논란[편집]

1831년 10월 14일에 태어난 한양유씨(漢陽劉氏) 유홍기(劉鴻基)는 한양유씨(漢陽劉氏)12세, 강릉유씨(江陵劉氏)20세이다. 자세히 풀어보면 강릉유씨 족보에서는 동도시조(東渡始祖) 문양공(文襄公) 휘(諱)전(筌)의 28세, 본관(강릉)시조 국재공(菊齋公) 휘 승비(承備)의 20세, 좌랑공파(左郞公派)휘 계주(繼周)의 15세, 한량계(漢良系) 14세, 한양본계(漢陽本系)) 12세 유홍기(劉鴻基)가 된다. 유홍기는 1831년(순조 31년) 10월 14일에 아버지 유익소(劉益昭)와 어머니 김해 김씨와의 사이에서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역관인 최영원(崔榮遠)의 딸 강릉 최씨와 결혼하여 외동아들 운두(運斗)와 두 딸을 두었다.[1] 그 이후에 딸이 2명이 아니라 3명인 것으로 밝혀 졌다.

출신 성분 논란[편집]

그의 출신배경이나 가문을 두고 양반 출신인가 중인 출신인가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이것은 역사가들이 유홍기가 중안(中人)이라고 강조하다 보니 생긴 논란으로 유홍기는 원래 태조(太祖)개국공신(開國功臣) 이등(二等)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유창(劉敞), 초명(初名)경보(敬輔), 국익(國謚) 문희(文僖)의 후손으로서 그의 가문에 흐르는 피는 양반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의 어머니를 잃고 정신이 혼미해져 명성황후의 탄생을 그의 집안에 큰글씨로 새겼다.

평가[편집]

개화파의 정신적 지주로 꼽힌다.

기타[편집]

김옥균전에 따르면 대치선생은 원래 역관의 집에서 태어났으나 의(醫)를 업으로 했고 깊이 불교를 믿어 도(道)는 높고 품성은 청백(淸白)했다.학문으로서는 사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 고금의 역사에 통달하였다.변설(辨說)은 유창했고 신체는 장대하고 홍안 백발이며 항상 생기에 넘쳐 행동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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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에 물을 주는 사람

2016. 4. 28. 17:58 | Posted by 빠오징(寶敬)



요즘 비밀이 하나 생겼다.
남몰래 돌봐야 할 대상이 생긴 것이다.
기분좋은 꽃, 오늘도 나는 화분에 물을 주며
이 작은 식물이 덩치 큰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에 감동한다. 만일 화가 나거나, 너무
바빠서 사는 의미를 잊었다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당장 작은 화분 하나를 구해
식물을 길러 보라. 그대도 진실로
행복을 느낄 것이다.

  
- 유영선의《100세 시대의 고민》중에서 -


* 꽃에 물을 주는 시간,
가장 고요하고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최고의 명상입니다. 꽃에 물을 주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도 행복한 시간입니다. 제 아내는
매일 새벽 옹달샘 정원의 풀을 뽑고, 물을 주고,
꽃밭을 가꾸는 일에 흠뻑 빠져 있습니다.
그런 아내를 보는 것만으로도
저는 더없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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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누리와 차별

2016. 4. 28. 17:55 | Posted by 빠오징(寶敬)

‘에누리’는 원래 ‘물건을 팔 때 받을 값보다 더 많이 부르는 것’을 뜻했다. 일종의 ‘바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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